제목 : 뒷북 치는 이야기
- 뉴욕교협에 바란다.
뒷북을 친다고 한다.이미 끝난 일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할 때, 그런 행동을 비하해서 하는 말이다. 내가 오늘은 뒷북을 치려고 한다. 이런 나의 행동을 두고 혀를 찰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 오늘 내가 하는 이야기에 관심을 둘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장로들은 조금 관심을 갖겠지만, 목사들은 씨익 웃거나 나를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할런지도 모른다. 서론(?)이 좀 길었다.
차기를 이끌어 갈 뉴욕 교협의 회장단과 감사 선거에 출마하려는 사람들은 입후보 등록을 하라는 공고가 나붙었다. 이번 선거에는 후보 등록비가 인상되었다. 선거에 관련이 있는 규정들이 개정될 조짐도 있다. 개정안이 총회에 제출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결말이 나려는지 모르겠다.
뉴욕 교협 회장단과 감사 선거를 앞두고, 평소에 가져왔던 생각들을 같이 나누어 보려고 한다.
첫째, 장로 회원이 회장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교협은 목사회와는 다르다. 교협은 교회들의 연합체이다. 교협의 회원 중에는 목사도 있고, 장로도 있다. 헌데 왜 목사들만 회장이 될 수 있고, 장로들은 회장이 될 수 없는가? 장로 회원이 회장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장로가 회장이 되면 협조가 제대로 안 되기 때문이란다. 누가 협조를 안 하는가? 목사들이 협조를 안 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목사가 회장을 하면 협조를 하고, 장로가 회장이 되면 협조를 하지 않는 목사라면, 그 목사는 목회를 그만 두는 것이 좋다. 목사 회원들이 원하는 것은 장로들은 후원금이나 내고, 조용히 있으라는 것이 아닌가? 대단히 온당치 못한 생각이다. 관련 규정들을 개정해서, 장로가 회장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교협 회장은, 목사보다 장로가 더 잘할 수도 있다. 목사는 목회만 해 왔지만, 장로는 훨씬 더 다양한 경험들을 해 왔기 때문이다.
둘째, 회장단의 임기를 2년으로 늘려야 한다. 임기 1년 동안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임기를 1년으로 한 이유가 "그래야 순서가 돌아오니까" 였단다. 웃기는 이야기다. 젯밥에만 관심을 두었다는 이야기다. 너도 한번 해야 하고, 나도 한번 하려면, 임기를 짧게 해야 한다는, 발상인 것이다. 임기를 늘려야 한다. 2년도 충분치는 않지만, 그래도 1년보다는 낫다. 회장으로 취임하고 나서, 업무를 제대로 파악해서, 임기 동안 뭐라도 제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셋째, 상근 사무총장 체제로 교협을 운영해야 한다. 그래야 회장단이 바뀌어도 업무의 효율성과 계속성이 담보된다. 교협의 업무들 중에는, 해마다 되풀이되는 일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시행착오가 되풀이된다. 회장단이 교체될 때마다 실무 책임자(총무)가 바뀌기 때문이다. 유급 사무총장제를 도입하면, 같은 시행착오가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예산 확보의 어려움이 있을테니, 처음에는 파트 타임 사무총장제를 도입하면 될 것이다.
넷째, 증경회장들은 "조용한 어른들"로서의 역할에 그쳐야 한다. 목사들의 모임을 대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것은, 어른들이 너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세를 80세에 부르셨다"는 이야기를 전가의 보도처럼 쓰신다. 어른들이 너무 앞장을 서니까 젊은 회원(목사)들이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그래서 나서신다고 하시겠지만), 조용히 계시는 것이 좋다. 내 개인적인 생각은 회의에 참석하지 마시고, 원만한 회의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다. 미국의 대통령들은 임기가 끝나면 워싱턴을 떠난다. 현직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목사들이 꼭 배워야할 덕목이다. 목회에서 은퇴했으면, 시무하던 교회를 떠나는 것이 좋다. 교협 회장을 지냈으면, 교협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뒷북을 쳤다. 이번에 선출되는 회장단이 앞장을 서서, 위의 네 가지 사항들에 대하여 진진하게 검토해 보길 부탁드린다. 안 된다고 하지 말고, 꼭 해 보길 권해 드린다. 괜찮은, 아니 썩 좋은 방안들 일 것이다.
김동욱 목사 : 뉴욕 코리안 닷 넷 대표
[운영자 주] 2016년 9월 10일 자로 발행된 <기독뉴스> 26호에 실린 글입니다.